천지창조, 생명과 문명의 순환을 그린 JRPG의 숨은 걸작
1995년 슈퍼패미컴으로 발매된 천지창조(Terranigma)는 지금 다시 돌아봐도 특별한 JRPG다. 수많은 플레이어가 화려한 전투나 캐릭터의 성장에 열광하던 시절, 천지창조 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. 이 게임은 ‘세계의 재건’이라는 독창적인 주제 아래, 생명과 문명,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 를 탐구한다.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작품을 단순한 모험 RPG로 생각했다. 하지만 플레이를 이어갈수록 느꼈다. 이것은 게임의 형태를 빌린 철학적 서사 였다. 지하에서 시작해 지상으로 올라가며 세상을 부활시키는 여정은 곧 인간의 역사이자,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비추는 거울이었다. 1. 천지창조의 세계관 ― 두 개의 세상, 하나의 운명 1-1. 지하세계와 금기의 문 천지창조 의 주인공은 지하세계에서 태어난 소년 아크(Ark)다. 그가 금지된 문을 열며 봉인된 힘이 깨어나고, 세계의 균형이 무너진다. 이 사건은 곧 ‘지상세계의 부활’을 예고하는 신화적 서사의 시작이었다. 지하세계는 어둡고 고요하지만,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살아 있다. 그곳에서 자란 아크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문을 열지만, 그 선택이 전 인류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. 1-2. 지상세계의 부활 지상으로 올라간 아크는 점점 사라져버린 세계를 부활시켜 나간다. 먼저 자연이, 그다음 동물과 인간이, 마지막으로 문명이 되살아난다. 이 단계적 부활은 마치 진화론을 압축한 듯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, 플레이어는 신의 시점이 아닌 ‘인간의 손으로 창조를 경험하는 존재’가 된다. 1-3. 빛과 어둠의 균형 이 게임의 핵심은 언제나 균형이다. 창조에는 반드시 파괴가 뒤따르고, 생명은 언젠가 죽음으로 돌아간다. 천지창조 는 이 단순한 진리를 정교하게 짜인 게임 구조로 표현해냈다. 2. 스토리 ― 인간이 만든 세계의 이야기 2-1. 자연에서 문명으로 천지창조 의 전반부는 자연의 부활을 중심으로 진행된다. 플레이어는 새를 되살리고, 숲을 복원하며, 대륙을 연결한다. 이 과정...